달빛 아래의 맹세
응급의학과 의사 김소라는 보름달이 뜬 밤 부상당한 낯선 남자를 치료하다가, 그가 자신의 가문이 감춘 비밀을 찾아 헤매던 무리의 후계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표식이 그의 손길에 응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개일 2026-08-03 · 10분 읽기
그 환자에게는 이름도 없었고, 보통의 자리에서는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달빛이 응급실 창을 가로지를 때 그의 눈은 은빛으로 번뜩였다.
01
7번 병실의 낯선 이
김소라는 징조 따위는 믿지 않게 될 만큼 야간 근무를 오래 해 온 의사였다. 그래서 7번 병실의 낯선 남자가 두 번이나 심정지를 일으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켰을 때도 흠칫하지 않았다. 신분증 없음. 일치하는 지문 없음. 늑골을 가로지른 상처는 봉합사가 닿기도 전에 아물어서, 그녀의 바늘은 멀쩡한 살갗 위에서 갈 곳을 잃었다.
“차트에는 심장 이상이라고 쓰고 싶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자갈처럼 거칠지만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였다. “진실보다는 그쪽이 깔끔하니까.”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쓸 건데요.” 그녀는 그의 동공을 확인했고, 어떤 차트에도 실려 있지 않은 방식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어두웠다가, 보름달이 창을 가로지르는 순간 은빛으로 번뜩이는 눈. “이름은요?”
“로언.” 그는 응급 환자들이 결코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마치 그녀야말로 응급 상황이라는 듯이. 그리고 장갑 낀 그녀의 손끝이 그의 쇄골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스쳤을 때, 그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초승달 모양 반점이 — 할머니가 엄지로 가려 주며 ‘우리 조용한 약속’이라고 부르던 그 반점이 —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따뜻해졌다. 소라는 표정만은 의사답게 유지했다. 맥박은 협조해 주지 않았다.
02
오래된 맹세
그는 새벽 네 시에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사라졌다가, 일곱 시 퇴근길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피를 흘린 사람이라면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자세로, 꼿꼿하게.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다만 좀 걸어야 합니다.”
도시 위쪽의 버려진 천문대는 소라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잠겨 있던 곳이었다. 로언은 문에 손바닥을 대는 것만으로 그곳을 열었고, 깨진 유리와 달빛이 쏟아지는 돔 아래, 둥글게 세워진 돌들에 그녀 할머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김해원. 지키는 자.
“두 가문이 여기서 맹세를 나눴습니다.” 로언이 말했다. “내 가문은 숨겨진 세계를 지키고, 당신 가문은 그 세계를 끝낼 권리를 지녔죠. 한 세대에 한 명, 태어날 때부터 표식을 지닌 지키는 자로.”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향했다. “우리 무리는 40년 동안 당신 가문을 찾아 헤맸습니다. 무기를 예상했는데, 죽음과 말싸움하는 걸 직업으로 삼은 의사를 찾았군요.”
“그럼 이 표식은요?” 소라가 물었다. 그는 머뭇거렸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한 남자였다. “맹세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에게도. 장로들은 그걸 ‘귀속’이라고 부르죠. 나는, 당신이 아직 받아 본 적 없는 질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03
질문
그녀는 아름다운 낯선 남자가 부탁한다는 이유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증거를 요구했고, 다음엔 내력을, 그다음엔 그가 분명히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까지 요구했다. 경쟁 무리가 그녀를 먼저 찾아내기 전에 그의 무리는 그가 지키는 자의 충성을 묶어 두기를 기대한다는 것. 그 결속 의식은 동의라는 개념보다 오래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는 그것을 쓰느니 차라리 전쟁에서 지는 쪽을 이미 택했다는 것.
“그럼 당신의 질문을 해요.” 소라가 말했다. 두 사람은 돌의 원 안에, 어느 쪽이 계획했던 것보다도 가까이 서 있었고, 깨진 돔 사이로 달이 은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장로들의 질문 말고. 당신 질문.”
“오늘 밤, 머물러 줘요.” 로언이 말했다. “맹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40년의 기다림 아래에서 그녀가 그에게 입 맞추자, 손목의 표식이 성냥불처럼 확 타올랐다. 병원에서 그토록 조심스럽던 그의 절제는 순식간에 타 없어졌다. 그녀의 코트가, 그의 셔츠가, 그녀의 상의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졌고, 자정에 따뜻할 권리가 없는데도 온기를 품은 돌에 그녀의 등이 닿았다. 그는 경건하면서도 굶주려 있었다.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가슴을, 골반의 곡선을 훑었고, 어떤 맹세보다 위에 있는 말인 양 그녀의 살갗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천천히 하라고 말해요.” 그가 말했다. 어느 때보다도 자갈처럼 거친 목소리였다. “나 의사예요.” 소라가 그를 자기 위로 끌어 내리며 말했다. “내 활력 징후는 내가 모니터링할게요.” 그는 웃었다. 그리고 곧 그녀가 그 농담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맥박이 조금도 임상적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녀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그의 손 주위로 허벅지를 떨게 될 때까지, 입술과 손가락으로 그녀를 몰아갔다. 그녀가 삼키지 못한 소리는 전부 오래된 돌들이 대신 간직했다.
마침내 그가 그녀를 가득 채웠을 때, 그것은 장로들이 알아볼 수 있는 무엇도 아니었다. 의식도, 귀속도 없었다. 그는 처음엔 느리게 움직였다. 그 자체로 하나의 맹세인 양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허리를 들어 그를 마주했고, 속도를 정했고, 원하는 것을 정확히 가져갔다. 절정이 가까워질수록 손목의 표식은 더 밝게 빛났고, 은빛이 그녀의 시야로 번져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둠 속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감싼 채 부서졌을 때, 그는 온전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따라갔다. 두 팔을 떨면서, 세상이 두 사람 아래 따뜻한 돌의 원으로 좁아지기라도 한 듯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그 후, 두 사람은 그의 코트에 뒤엉켜 누운 채 깨진 돔 사이로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식은 두 번째 심장 박동처럼 부드럽게 고동쳤다. 두 어른이 서로를 너무나 격렬하게 선택했기에, 돌들은 그 열기를 새벽까지 간직했다.
04
적대하는 무리
달이 지는 시각, 경쟁 무리가 찾아왔다. 천문대 난간 위로 열두 개의 그림자가 넘어왔고, 그들을 이끄는 잿빛 눈의 여자는 오래된 결속을 타고난 권리라 불렀고, 소라를 치워야 할 뒷정리라 불렀다.
로언은 문간을 지키면서도 단 한 번도 소라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수적으로 밀리면서도, 항복하는 편이 훨씬 간단했을 순간에도. “지키는 자가 선택한다.” 그가 잿빛 눈의 여자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게 언제나 맹세였어. 너희는 세계가 목줄에 묶인 채 살아남길 바라지. 세계는 선택 위에서 살아남는 거다.”
소라는 수백 번의 응급 코드를 견뎌 내게 해 준 의료인의 침착함으로 원 안에 걸어 들어가, 표식이 새겨진 손목을 가장 오래된 돌에 대고, 40년의 두려움을 한 문장으로 다시 썼다. “숨겨진 세계는 숨겨진 채로 남는다.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으며. 그리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자는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는다.” 돌들이 그녀에게 응답했다. 은빛이 오래된 의식을 부드럽게 해체해 나갔다. 다 나은 상처에서 실밥이 뽑혀 나오듯이.
05
선택으로
해가 떠오를 무렵, 소라의 손목에 있던 표식은 가늘고 조용한 선으로 옅어져 있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라앉은 것이었다. 더는 소리칠 필요가 없어진 약속처럼.
“장로들은 내가 실패했다고 하겠지.” 로언이 말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넝마가 된 셔츠 차림으로, 볼썽사납게.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게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어.”
“나을 거예요.” 소라가 습관처럼 그의 늑골 위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상처는 벌써 아물고 있었다. “반칙 같은 생물학이네.”
“머물러 줘요.” 그가 말했다. 같은 질문이었지만, 이제 그 뒤에 맹세는 없었다.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소라는 고민하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일곱 시에 근무가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끝나면 다시 올게요. 커피나 좀 좋은 걸로 준비해 둬요. 예언쯤이야, 솔직하게 초대를 주고받는 두 어른을 기다려 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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