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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빨간 펜

나그네 · 3010자 · 한국어

【완 · 아내】

화요일 밤 아홉 시 사십 분. 배가 고파진 린완은 냉장고 문을 열고 배달 메뉴판 뭉치를 빼내려 했다. 냉장고 자석은 빛바랜 도자기 귤 하나. 끝이 말린 메뉴판 대여섯 장을 누르고 있었고, 맨 밑은 아래층 차오산식 뚝배기 죽집이었다. 잡아당기자 반으로 접힌 A4 용지 한 장이 따라 미끄러져 나와 슬리퍼 옆에 떨어졌다. 집 프린터는 잉크가 떨어져 가서, 뽑으면 두 줄마다 하얀 줄이 한 가닥씩 갔다. 그녀는 한눈에 알아봤다. 종이에는 번호가 매겨진 문장들이 있었다. 1, 2, 4, 5…… 10까지. 3이 없었다. 11년 차 편집자인 그녀의 첫 반응은 내용을 읽는 게 아니라 세는 것이었다. 한 조가 빠졌다. 읽는 건 그다음이었다. 그녀는 선 채로 끝까지 읽었다. 냉장고 문은 열려 있고, 냉기가 종아리에 들러붙고, 컴프레서가 웅 하고 돌다가 또 웅 하고 멈췄다. 세 번째로 다 읽었을 때, 죽 생각은 까맣게 잊었다.

【위 · 남편】

저우위는 열한 시가 되어서야 현장에서 돌아왔다. 머리엔 아직 안전모 자국이 눌려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 한 짝을 벗다가 그대로 멈췄다. 식탁 위에 그 종이가 반듯하게 펼쳐져 있었다. 네 귀퉁이를 후추통, 리모컨, 그녀의 안경집, 빈 와인잔으로 눌러 놓고. 결재를 기다리는 도면처럼. 종이엔 빨간 글씨가 늘어나 있었다. 그 펜은 안다. 그녀가 원고 고칠 때 쓰는 펜, 뚜껑엔 그녀가 씹은 잇자국이 한 바퀴 둘려 있다. 3주 전 새벽 두 시, 그는 한 익명 게시판에서 이걸 봤다. 다 읽고도 창을 닫지 않고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인쇄를 눌렀다. 조용한 집 안에서 프린터가 덜컥덜컥 울렸고, 그는 서재 문간에 서서 위층에서 누가 벽을 부수는 것처럼 뛰는 심장을 안고, 침실 문이 열릴까 봐 떨었다. 종이는 나왔다. 버리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건네지도 못했다. 이 집에서 그녀가 절대 손대지 않는 곳은 딱 한 군데, 그 배달 메뉴판 뭉치였다. 배달은 늘 그가 시켰으니까.

【완 · 아내】

그녀는 그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빨간 펜 뚜껑을 입에서 뺐다. 첨삭은 레드와인을 마시며 쓴 것이라 글씨가 갈수록 흐트러졌다. 8조 ‘여자의 성충동은 남자보다 훨씬 크다’ 옆에는 “표본 수는? 출처는? 누가 쟀는데?” 2조 옆에는 “논리 성립 안 됨. 그 말대로라면 많이 펼쳐 본 헌책일수록 비싸야 함.” 6조의 ‘필수재’ 세 글자엔 동그라미를 치고 “부동산 중개업자 말투. 삭제.” 9조의 ‘무능’엔 가위표. “누가 썼어? 이 단어 자체가 무능하네.” 유전자와 아이에 관한 조항엔 첨삭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빨간 줄 하나로 그어 버렸는데, 얼마나 세게 그었는지 종이가 일어나 있었다. 옆에 딱 한 줄. “역겨움. 나랑 상관없음.” 그런데 1조 뒷부분 ‘남편은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더 노력하게 된다’ 밑에는 물결선을 긋고 이렇게 썼다. “이건…… 논의 가능.” 7조의 ‘대화가 늘어난다’엔 “우리가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몇 년도지?” 10조 마지막 문장 ‘여자는 더 좋은 섹스를 누려야 한다’엔 먼저 ‘비문’이라고 달았다가, 한 줄 띄워 덧붙였다. “그래도 뜻은 맞음. 논의 가능.”

【위 · 남편】

“당신이 뽑은 거지.” 묻는 게 아니었다. “응.” “나더러 다른 남자랑 자라고?” 저우위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평생 보를 수천 개는 계산했다. 24미터짜리 철골 보가 얼마의 하중에 몇 밀리 처지는지, 언제 금이 가는지 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계산이 안 됐다. 식탁 위 난도질당한 빨간 줄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결국 나온 건 자기도 예상 못 한 말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아는 건, 그날 밤 그거 읽고 밤새 섰다는 것뿐이야. 잠을 못 잤어.” 말하고 나니 귀가 화끈거렸다. 결혼 9년 동안, 그녀 앞에서 ‘섰다’는 말을 입에 올린 건 아마 처음이었다.

【완 · 아내】

싸울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가슴 어딘가를 누가 손톱으로 튕긴 것 같았다. 9년. 한 달에 한 번, 불 끄고, 그가 위에서 5분 움직이고, 싸면 미안하다 하고, 돌아누워 등을 보이는.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그가 코를 골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어나 샤워를 했다. 샤워기를 마사지 모드로 돌려 자기한테 대고, 10분, 수건을 물고 소리 없이. “내가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젠지 알아?” 그녀가 와인잔을 밀어냈다. “지난주 목요일. 욕실. 샤워기.” 저우위는 굳었다. 누가 슬래브에 철근 한 층이 빠졌다고 알려 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이야기했다. 그가 그녀에게 뭘 입히고 싶은지, 그가 어떨 때 너무 빨라서 그녀가 싫은지, 대학 때 암실에서의 어느 밤에 대해. 냉장고가 부엌에서 웅웅거렸다. 9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섹스 이야기를 한 밤이었다. 나중엔 둘 다 목이 쉬어 있었다.

【위 · 남편】

규칙은 그녀가 새 원고지에 썼다. “당신 그 리스트는 남의 거야. 우린 남의 걸 따르지 않아.” 세 개를 다 쓰고 나서, 그녀는 편집자 버릇대로 조마다 번호를 붙이고 문구를 두 번 고쳤다. 제1조. 결정은 그녀가 한다. 언제든 ‘그만’ 한마디면 멈춘다. 이유는 묻지 않는다. 아무도 묻지 못한다. 제2조. 그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며, 처음엔 그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제3조. 집에 돌아오면 서로의 것이다. 있었던 일은 전부 상대에게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디테일도 숨기지 않는다. 저우위는 제2조 뒤에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를 넣고 싶어 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고쳤다. ‘그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 단, 말없이 떠나서는 안 된다.’ 그다음 그가 물었다. 누군데. 그녀가 그 이름을 말한 속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청쉬.” 말해 놓고 먼저 고개를 숙인 건 그녀였다.

【완 · 아내】

청쉬는 대학 사진 동아리 선배였다. 그녀보다 일곱 살 위. 그해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동아리를 맡고 있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암실이었다. 빨간 안전등이 모든 걸 핏빛 오렌지색으로 적시고, 정착액의 시큼한 냄새가 나고, 어느 밤 그가 그녀 뒤에 서서 현상 트레이 흔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뒷목에 닿고, 손안의 인화지 위로 사람 형체가 천천히 떠올랐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불이 켜지고, 누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서북 지방으로 가 몇 년을 찍었고,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작년에 그녀가 편집한 산문집 표지 촬영을 그에게 맡겼고, 둘은 회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오후 내내 시안을 맞춰 봤다. 그는 그녀를 ‘완완’이라고 불렀다. 그때와 같은 호칭으로. 그날 밤, 저우위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그녀는 청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 주 금요일 시간 돼요? 남편이랑 같이 저녁 대접하고 싶어서요.” 보내고 나서 그녀는 휴대폰을 탁자에 엎어 두고, 한참을 뒤집어 보지 못했다.

【쉬 · 그 남자】

그 메시지가 왔을 때 청쉬는 흑백 필름 한 롤을 현상하던 중이라 손이 아직 젖어 있었다. 손가락 관절로 화면을 밀어 열고 두 번 읽었다. ‘남편이랑 같이.’ 그녀는 그 말을 그렇게 또렷하게 썼다. 일부러 탁자 위에 올려놓고 보여 주듯이. 그는 마흔둘, 이혼한 지 6년. 이 나이가 되면 문장은 쓰이지 않은 부분부터 읽게 된다. 그는 한 마디만 답했다. “좋아요.” 금요일, 그는 ‘반산’이라는 프라이빗 다이닝에 20분 일찍 도착해 창가 자리를 골랐다. 두 사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쪽에 앉았다. 오랫동안 장비를 짊어진 탓에 손가락 마디가 굵었고, 오른손 검지 끝엔 셔터를 누르며 박인 딱딱한 굳은살이 있었다. 두 손을 식탁보 위에 올려놓았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 거둬 무릎 위에 얹었다.

【위 · 남편】

청쉬는 저우위가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187센티쯤, 어깨가 넓고, 회색 린넨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말이 느렸다. 한 마디 한 마디 초점을 먼저 맞추고 나서 꺼내는 것처럼. 그는 윈저우에서 한 신혼부부의 결혼식을 찍었는데 반지를 교환하다가 신랑이 기절해 버렸고, 신부가 쪼그려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뭘 연기하고 있어”라고 욕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린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고개를 젖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떨며. 그녀를 보던 저우위의 위장이 쿵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가 층과 층 사이에서 한순간 무중력이 된 것처럼.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다음 그는 청쉬가 그녀의 말을 듣는 모습을 알아챘다. 절대 끊지 않는다. 그녀가 한 문장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거기서 반 박자를 더 쉬고 나서야 받는다. 저우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반쯤 말하면 이미 결론을 알았고, 대신 말해 버렸다.

【완 · 아내】

네 번째 요리가 나왔을 때, 그녀는 테이블 밑에서 오른발을 하이힐에서 빼냈다. 스타킹 너머로 나무 바닥이 조금 차가웠다. 먼저 닿은 건 테이블 다리, 그다음은 청쉬의 종아리였다. 얇은 정장 바지 아래 근육이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다만 하던 말이 느려졌다. 그녀가 그 틈을 알아들을 만큼. 그녀의 발이 그의 종아리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 오금 바로 아래에서 멈췄다. 그러는 내내 그녀는 맞은편의 저우위를 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젓가락을 쥔 저우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알고 있다는 걸 보는 순간, 그녀의 목이 조여 왔고, 아래는 젖어 들었다. 팬티가 들러붙어 축축하게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부끄러우면서도 의기양양했다. 아무도 감히 못 쓴 원고를 혼자 제출한 사람처럼.

【쉬 · 그 남자】

식사가 끝나고 저우위는 차를 빼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입구엔 두 사람만 남았다.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입가로 날렸지만, 그녀는 쓸어 넘기지 않았다. “다음 주 토요일.” 그녀가 말했다. “호텔은 우리가 잡을게요. 그이도 있을 거고. 괜찮겠어요?” 청쉬는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암실의 그 빨간 등이 떠올랐다. 끝내 다 현상하지 못하고 폐액통에 던져 버린 그 인화지도.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데.” 그가 말했다. “너는, 괜찮아?” “결정은 내가 해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 “그게 우리 제1조예요.” 헤드라이트가 경사로를 훑으며 올라와 그녀의 얼굴 절반을 비췄다. 청쉬가 말했다. “그럼 네가 정해.” 그녀가 말했다. “와요.”

【위 · 남편】

돌아오는 길, 빨간불에서 그녀가 갑자기 기어봉 위에 얹힌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치마 속으로 밀어 넣어 다리 사이에 눌렀다. 스타킹과 팬티 너머로도 그곳은 흠뻑 젖어 있었고 데일 듯 뜨거웠다. “밥 한 끼 먹고 이렇게 된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손을 다시 기어봉에 돌려놓았다. “집에 가서 나 건드리지 마. 토요일까지 아껴 둬.” 초록불이 켜졌고, 뒤차가 경적을 울리고서야 그는 액셀 밟는 걸 떠올렸다. 그는 가는 내내 천천히 몰았다. 바지 속은 아플 만큼 단단했고, 손가락엔 아직 그녀의 냄새가 남아 있어서 차마 닦을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서니 거실은 불이 꺼져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부엌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마침 냉장고 문 위에 떨어졌다. 그녀가 그 리스트를 다시 끼워 두었다. 이번엔 배달 메뉴판 맨 위에, 빨간 글씨가 바깥을 향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