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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1장 세 번 돌려

나그네 · 2733자 · 한국어

박 사장은 아파트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끈 채 내리지 않았다. “그 빨간 거,” 그가 내 바람막이를 가리켰다. “복도에서 한눈에 보여. 벗을래?” “벗으면 뭘 입고.” 내가 말했다. 한강은 바로 길 건너에 있었고, 밤 아홉 시의 바람이 수면을 타고 넘어와 차창에 김이 한 겹 서렸다.

먼저 이 늑대부터 밝혀 두자. 서른여덟, 무역 일, 일 년의 절반 넘게 비행기 위에서 살고, 이혼 삼 년 차, 키 172, 동생 놈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정상위는 경험이 없다. 빨간 바람막이는 거래처 하나가 선물한 건데, 공항에서 마중 나올 때 알아보기 쉽다고 했다. 확실히 알아보기 쉽다. 어딜 가든 이정표처럼 눈에 띌 만큼.

박 사장은 이쪽에서 내 거래처다. 마흔둘, 나와 같은 업종, 계약 얘기가 끝나면 우리는 그냥 같은 부류의 사내다. 그가 말하길 이 건물에는 노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이쪽 사람들은 그걸 아파트 랜덤박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문이 열리기 전에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문이 열리면, 그때 남을지 말지 정하면 된다.

“안 맞는 걸 까면?” “잘 가요 하고 내려와.” 그가 말했다. “그쪽도 마찬가지야.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문 닫아도 돼. 봉투는 네 주머니에 그대로 있고, 아무도 누구한테 빚진 거 없어.”

“규칙은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기억해.” 그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16층, 끝까지 걸어가서 그 문. 두드리지 마, 두드려 봤자 아무도 안 받아. 손잡이를, 세 번 돌려.” “세 번 돌려.”

“문이 열리면 그쪽이 널 보고, 넌 그쪽을 봐. 안 맞으면 잘 가요 하고 내려와서 날 찾아, 다른 문 돌리지 말고. 다른 문 뒤에는 쉬는 사람도 있고 손님 받는 사람도 있어. 이쪽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네가 아무 문이나 하나 잘못 돌리면 층 전체가 건물에 중국 남자 하나 들어왔다는 걸 알게 돼.” “이 옷 입고 있으면 층 전체가 어차피 알 텐데.”

그는 웃지 않았다. “봉투는 내가 준비해 놨고, 액수는 너도 알지. 들어가서 그쪽 앞에서 세지 마, 예의가 아니야.” 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전에 한국 여자 친구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 “스물다섯 살 때. 은희라고.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지.” “그럼 오늘은 복습이네.”

나는 차 문을 열었다. 이왕 온 거다.

“잠깐.” 박 사장이 차창을 내렸다. “그쪽이 싫다고 하면, 싫은 거야. 이쪽 사람들은 두 번 말 안 해.” “내가 중국어도 다 알아듣는데 싫다는 말을 못 알아듣겠어?” “너는 알아듣지.” 그가 말했다. “네 그 물건이 못 알아들어.”

아파트는 흔하디흔한 그런 건물이었다. 입구에 양철 우편함이 한 줄, 그중 두 개는 광고지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관리사무소 공지가 한 장 붙어 있었는데,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어서 대신 엘리베이터 거울이나 실컷 봤다. 빨간 바람막이를 입은 중년 남자, 머리는 깎을 때가 됐고, 표정은 거래처 만나러 가는 사람 같았다.

층수 표시등이 1에서 16까지 뛰어오르는 동안, 한 칸 뛸 때마다 박 사장의 말을 속으로 한 번씩 되뇌었다. 세 번 돌려, 안 맞으면 내려와, 다른 문 돌리지 마. 봉투는 안주머니 속에서 셔츠 너머로 가슴에 붙어 있었다. 딱딱한 한 덩어리.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 혼자였고, 16층까지 한 번도 서지 않았다.

16층 복도는 엘리베이터 안보다 더 어두웠다. 천장의 등 한 줄은 절반이 나가 있었고, 남은 절반도 별로 밝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양쪽 다 문이었고, 전부 닫혀 있었다. 텔레비전 소리도 없고, 물소리도 없고, 말소리도 없었다. 방음이 너무 좋아서 박 사장이 동 번호를 잘못 기억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복도에 잠시 서서 문을 셌다. 왼쪽 일곱, 오른쪽 일곱, 끝에 있는 그 문까지 더해 열다섯. 문 열다섯 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 열다섯. 감정학은 문밖에서는 공란이다. 열린 문만 인정한다.

끝에 있는 그 문은 다른 문들과 똑같이 생겼다. 손을 내밀었다가 도로 거두고, 바람막이 지퍼를 끝까지 올린 다음 다시 내밀었다.

손잡이. 한 번. 두 번. 세 번.

문이 열렸다.

복도는 너무 어두웠고 문 안은 너무 밝았다. 빛이 그녀의 등 뒤에서 쏟아져 나왔고, 나는 먼저 윤곽을 보았고, 그다음에 빛 속에서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 한 자락을 보았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얼굴에서 바람막이로, 다시 얼굴로.

이 늑대의 감정학은 이 일 초 동안 먹통이었다. 감정학에는 조명이 필요하고, 정면이 필요하고, 그녀가 가만히 서서 허리부터 발목까지 훑어보게 해 줘야 한다. 그녀는 서 있지 않았다. 손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은 작았고, 손가락은 차가웠다. 그녀가 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문 뒤에는 천 커튼이 하나 더 걸려 있었다. 걷어 올리자 원룸 아파트였다. 창 아래 붙여 놓은 싱글 침대 하나, 회색 시트,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돌아 나오면 열 평방미터 남짓한 거실, 오른쪽에 천 소파 하나와 티테이블 하나, 왼쪽에 미니바, 그 위에 수건 한 무더기, 티슈 한 무더기, 1리터짜리 생수 한 줄, 병 라벨은 전부 바깥을 향해 있었다. 통로 오른쪽은 욕실, 문이 한 뼘 열려 있었고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집 전체가 내가 묵는 호텔 방보다 작았고, 내가 묵는 호텔 방보다 깨끗했다.

이제 빛이 있었다.

머리는 주황빛이 도는 빨강, 손질한 티가 나는 그런 윤기, 쇄골까지 오는 길이. 피부는 희었다. 한성의 겨울 같은 흰색. 흰 블라우스에 검은 짧은 치마. 치마는 그렇게 짧지 않았다. 딱 허벅지 중간쯤. 누굴 접대하러 나온 사람 같지 않고, 커피 한 잔 사러 내려가려는 사람 같았다. 다리는 곧았고, 치맛단에서 발목까지 점 하나 없었고, 흉터 하나 없었다. 발에는 흰 양말, 슬리퍼는 분홍색, 이 집의 다른 물건들과 똑같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허리 엉덩이 비율, 합격. 순정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쪽 기술에는 내기를 걸 엄두가 안 난다. 협조도, 보류. 다리는, 이 늑대는 원래 점수를 안 매긴다. ‘본다’와 ‘안 본다’로만 나눈다. 이 다리는 ‘본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입꼬리 오른쪽에 작은 덧니 하나가 드러났다.

“Shoes.” 그녀가 내 신발을 가리키고 쪼그려 앉아 신발장에서 회색 슬리퍼 한 켤레를 꺼내 내 발 앞에 놓았다. 쪼그려 앉을 때 짧은 치마가 한순간 팽팽해졌고, 나는 눈을 벽으로 옮겼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 한 장 걸려 있지 않았다.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녀는 나를 소파에 눌러 앉히고 미니바에서 생수 한 병을 가져와 뚜껑을 딴 다음 건넸다. 한 모금 마시는 사이 그녀는 벌써 티테이블 아래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뽑아 내 입가에 대 주고, 라이터를 들어 직접 불을 붙여 주었다. 라이터는 편의점에서 파는 그 투명한 거였고, 안에 가스가 반도 안 남아 있었다.

그러고는 내 옆에 앉아, 내 어깨에 기대 왔다.

아무런 과정이 없었다. 들어온 지 이 분도 안 됐는데, 한 사람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있고, 머리카락이 내 목에 닿아 있고, 샴푸 냄새와 아주 약간의 담배 냄새가 났다. 지난 삼 년 동안 누군가 내 어깨에 기댄 횟수는, 이번을 더해서, 한 번.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영어로 물었다. 영어가 괜찮았다, 내 것보다 나았다. “라오랑. 늙은 늑대.” “늑대?” 그녀가 웃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럼 뭐로 보이는데?” “음……”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중국어로 바꿔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 “길, 을, 잃, 은, 것, 같, 아.”

“중국어 할 줄 알아?” “조금요.” 그녀가 엄지와 검지로 틈 하나를 만들어 보였다. “반년 배웠어요. 중국은 안 가 봤어요. 베이징, 상하이.” “또 뭐 알아?”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세 번째에 이르러 그녀는 일부러 나를 한 번 쳐다봤다. “싫어요.” “마지막 걸 제일 잘 배웠네.” “마지막 게, 제일 쓸모 있어요.”

“빨간색.” 그녀가 내 소매를 집어 보였다. “복도에서, 엄청 밝아요.” “거래처가 준 거야.” “거래처가 당신을 좋아하네요.” “거래처는 내가 돈 내는 걸 좋아하지.” 그녀가 웃으며 소매에 떨어진 담뱃재를 털어 냈다.

그녀는 소연이라고 했다. 스물일곱.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한 지 사 년, 호텔 프런트에서 일하고, 월급은 적고, 집에 손 벌리기는 싫고, 이 아파트는 자기가 직접 빌린 거라고 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말투가 “베이징, 상하이”라고 말할 때와 똑같이 평평했다. 하소연이 아니라 인적 사항을 보고하는 거였다.

“프런트, 여덟 시간 서 있어요.” 그녀가 한쪽 다리를 들어 내 앞에서 쭉 폈다가 다시 내렸다. “다리는, 서서 만든 거예요.” “서서 만든 게 운동으로 만든 것보다 예뻐.” “다리 봐요?” “나는 뭐든 다 봐.”

이 인적 사항이 누구 들으라고 보고하는 건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귀담아들었다.

“무슨 일 해요?” “물건 팔아.” “무슨 물건?” “뭐든 다 팔지.” 내가 말했다. “나 자신만 안 팔아 봤어.” “나는 시간을 팔아요.” 그녀는 아주 가볍게 말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을 다 팔아도, 나는 여전히 나예요.”

“눈이 예뻐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손이 따뜻해요. 목소리가, 낮아요.”

세 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셌다. 나는 속으로 그녀의 협조도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가, 다시 생각했다. 이렇게 술술 나오는 걸 보면 아마 손님마다 눈이 예쁘고, 손이 따뜻하고, 목소리가 낮을 거다.

“전 손님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물었다. “전 손님은 눈이 작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손이 따뜻하다고 했어요.” 나는 웃었다. 부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늑대는 그녀에게 가산점을 준다.

“영어 잘하는 중국 남자는,” 그녀가 말했다. “집에 돈도 많고, 다 다정하대요. 진짜예요?” “반은 진짜.” 내가 말했다. “다정한 쪽 반.”

그녀가 덧니가 다시 드러나도록 웃었다. “나랑 더 얘기하고 싶어요?” “응.”

그녀의 손이 뻗어 와, 바지 위로 내 사타구니를 한 번 눌렀다.

“거짓말.” 그녀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서 있었다. 그녀가 슬리퍼를 꺼내려고 쪼그려 앉던 순간부터 섰고, 지금까지 내내 서 있었고, 두 겹의 천 너머로 그녀에게 한 번 눌리자 담뱃재가 또 바람막이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몸을 똑바로 세워 내 어깨에서 떨어지고, 돌아앉아 나를 마주 보며, 오른손을 내 눈앞에 들어 올렸다.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펼쳤다.

그녀가 ok 사인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