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의 가을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한결 추웠다. 박 사장은 그 아파트 건너편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는 풀지 않았다.
“14층.” 그가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꺾어서, 끝까지 가면, 끝에서 두 번째 문.” “16층 아니에요?” “16층 그분은 이번 주 쉬어.” 그가 나를 한 번 봤다. “아직 마음에 두고 있어?”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냥 물어보는 사람은 층수를 기억 안 해.”
박 사장, 마흔둘, 나와 같은 업계, 엄밀히 말하면 내 고객이고, 매년 내 손에서 컨테이너 세 개 분량의 물건을 가져간다. 그는 잘 웃지 않는 얼굴을 가졌는데, 웃을 때면 눈이 한 줄로 가늘어진다. 그 줄이 오늘 밤 두 번 나타났고, 둘 다 내가 층수를 물었을 때였다.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할 건 없다. 지난번에 뜯어 본 그 애는 소연이라고 했고, 콧방울에 맺힌 그 한 방울이 나를 스물다섯에서 서른여덟으로 끌어다 놓았다. 한마디로 넘기고, 더 풀지 않겠다.
먼저 이 늑대의 출고 데이터부터 보고하겠다, 늘 하던 대로. 라오랑, 서른여덟, 무역 일을 하고, 일 년에 이백 일은 밖에 나가 있고, 이혼한 지 삼 년. 키 172, 동생 놈은 크지 않고, 정상위는 별로 경험이 없고, 빨간 바람막이를 입고 다녀서 어디를 가든 소화전 같다. 오늘 밤에도 입고 있었다. 박 사장이 그거 좀 갈아입으면 안 되냐고 해서, 나는 이게 출장용 명찰이라고, 길 잃으면 찾기 좋다고 했다.
“규칙은 지난번이랑 같아.” 박 사장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세 번 돌려. 그 애가 문을 열면, 자네도 한 번 보고, 그 애도 한 번 봐. 안 맞으면 내려와, 내가 다음 문을 알아봐 줄 테니까.” “맞으면요?” “맞으면 나한테 묻지 마.” “그 애 쪽에서 안 맞으면요?” “그 애가 안 맞으면 그 애가 말해.” 그가 차창을 조금 내렸다. “너희 중국 사람들은 꼭 이 일에서 한쪽만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
“이건요?” 내가 봉투를 흔들었다. “지난번이랑 같아, 더도 덜도 없이.” “얼마요?” “지난번에 안 세어 봤어?” “안 세어 봤어요.” “그럼 이번에도 세지 마.” 그가 말했다. “세면 그 애가 자네 처음인 줄 알아.”
차에서 내려 바람막이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아파트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로비 조명은 절전형이라 절반은 켜지고 절반은 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층수 표시등이 8에서부터 내려왔다. 7, 6, 5, 한 칸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김치 냄새가 났고, 벽에는 관리사무소 공고문이 한 장 붙어 있었다. 한국어라 한 글자도 못 읽었다. 나는 안에 서서 층수 표시등이 올라가는 걸 봤고, 심장도 그것과 똑같이 한 칸 한 칸 뛰었다. 14에 닿자 문이 열렸다.
복도는 16층과 똑같았다. 조명은 어둡고, 문은 전부 닫혀 있고, 바닥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배달 봉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발소리를 죽였다. 박 사장이 말했었다. 어떤 문 뒤에서는 쉬고 있고, 어떤 문 뒤에서는 손님을 받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끝까지 가서, 끝에서 두 번째, 짙은 회색 문, 손잡이는 가로 막대식이었다.
문 앞에 서서 먼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난번 16층 문 앞에서도 깊게 들이쉬었으니,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주의를 줬다. 그렇게 세게 들이쉬지 마, 세상 물정 모르는 티 나니까.
한 번 돌리고, 두 번 돌리고, 세 번 돌렸다.
문이 열렸다. 복도 불빛이 방 안보다 어두워서, 먼저 보인 건 윤곽이었다. 어깨선은 부드러웠다, 운동으로 만든 직각이 아니었다. 머리는 짙은 갈색, 생머리, 쇄골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봤다. 예약 전표를 대조하는 것처럼.
“오빠?” 목소리가 아주 작았고, 약간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예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박 사장이 잡아 줬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길고, 손톱은 짧게 깎여 있고, 색은 칠하지 않았다. 손바닥은 말라 있었고, 살짝 차가웠다. 방금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꺼낸 내 뜨거운 손과 닿으니, 냉장고에서 막 꺼낸 달걀을 만지는 것 같았다.
“들어와요.”
문 뒤에는 역시 그 천 커튼이 있었다. 걷어 올리니, 방은 16층 방보다 작았고, 그 방보다 밝았다. 싱글 침대가 창가에 붙어 있고, 회색 시트는 각이 지게 개어져 있었다. 소파 하나, 탁자 하나, 작은 물 바 하나. 물 바에는 수건, 티슈, 그리고 1리터짜리 생수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생수 줄을 한 번 더 봤다. 모든 병의 라벨이 바깥쪽을,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고, 라벨에 그려진 그 파란 작은 산까지 한 선에 맞춰져 있었다. 무역 하는 사람은 이런 데 반응한다. 나는 십육 년 동안 물건을 검수했고, 컨테이너 통째로 봐 왔지만, 물건을 이렇게 진열해 놓은 공장은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쪼그려 앉아 내 발 옆에 슬리퍼 한 켤레를 놓았다. 앞코가 안쪽을 향하게. 나는 갈아 신었다. 그녀는 일어나 물을 따랐다. 유리잔에, 칠 할까지 채워서, 건네주고, 그러고는 자기는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두 다리를 모으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그녀는 미색 니트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안에는 끈 나시, 아래는 무릎까지 오는 치마였다. 다리는 아주 곧고, 발목은 가늘고, 종아리 라인에는 군살이 한 점도 없었다. 웃을 때 눈이 얕은 초승달로 휘었고, 왼쪽 뺨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저는 지수예요.” 그녀가 먼저 영어로 말하고, 중국어로 한마디 덧붙였다. “스물여섯.” “라오랑. 서른여덟.” “라오랑.” 그녀가 따라 말했다. “랑, animal?” “맞아요, animal. 늙어 빠진 종류.” 그녀는 뒷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웃었다.
“오빠는 어디서 왔어요?” “세 시간 비행하는 곳.” “며칠 있어요?” “나흘. 이틀은 전시회 보고, 하루는 물건 얘기하고, 하루는……” 나는 이 방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말은 받지 않았다. 나는 일정표를 보고했고, 그녀는 수령 확인만 했다.
“지수는 낮에 뭐 해요?” “출근해요.” “무슨 일?” “비행기표 예약하는 일.” 그녀가 말했다. “다른 사람 대신.” “본인은 타 봤어요?” “아니요.” 그녀가 잠깐 생각했다. “내가 예약한 표는, 다른 사람이 타요.”
“오빠는 이 건물에 와 본 적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박 사장이 말해 줬어요?” “슬리퍼로 갈아 신었잖아요.” 그녀가 내 발을 가리켰다. “처음 온 사람은 다 서서 꼼짝 안 해요.”
이 늑대가 무역 일을 십육 년 했지만, 슬리퍼 갈아 신는 걸로 이력을 검수당한 건 처음이었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상온이었다. 그녀가 계산해 둔 것이었다.
“오빠 먼저 씻을래요?” “당신이 정해요.” “저는 안 정해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오빠한테 물어요.” “그럼 일단 안 씻을게요.” “네.” 그녀가 내 잔을 가져가서, 칠 할까지 채우고, 다시 내 손에 쥐여 줬다. “그럼 오빠는 물 마셔요.”
“추워요?” 그녀가 물었다. “안 추워요.” “옷이 되게 빨개요.” “출장용 명찰이에요.” 내가 말했다. “길 잃으면 찾기 좋거든요.” “오빠가 길을 잃어요?” “박 사장이 그러는데 내가 공항에서 소화전 같아서, 찾을 필요가 없대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잠깐 웃었다. 아주 짧게. 웃고 나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오빠는 뭘 좋아해요?” “무슨 뜻이에요?” “어떤 사람은 말하는 걸 좋아해요. 어떤 사람은 말 안 하는 걸 좋아해요.” 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단어를 고르듯이. “어떤 사람은 제가 먼저 하는 걸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는 걸 좋아해요.” “당신은요?” “저는 물어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매번 물어요.”
그녀는 그 바람막이를 봤다. 벗겨 줄까 말까 생각하는 것처럼. 벗기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내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그렇게 올려놓았다. 주무르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그녀의 손은 나보다 한결 차가웠고, 십몇 초를 그렇게 두자, 두 손의 온도가 가운데로 향해 가는 게 느껴졌다.
“해도 돼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멍해졌다. 그녀가 무엇을 묻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손을 여기에 올려놔도 되냐는 건지, 아니면 그 뒤의 일 전부를 묻는 건지.
“돼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내 손바닥에 맞대고, 손가락을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 쥐었다.
나는 박 사장이 준 봉투를 바람막이 안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 그녀는 받아서, 봉한 자리를 한 번 보기만 하고, 열지도 않고, 세지는 더더욱 않고, 옆에 있는 작은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안 세어 봐요?” “오빠가 덜 줄 거예요?” “아니요.” “그럼 제가 왜 세요.” “혹시 내가 더 줬으면요?” “그건 오빠 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제 몫을 가져요.”
받아칠 말이 없었다. 무역 바닥에서 돈 세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검수하는 사람, 물건 받는 사람, 잔금 치르는 사람, 하나같이 센다, 두 번씩 센다. 그녀는 세지 않았고, 내가 평생 받아 본 신뢰를 전부 그 아래로 눌러 버렸다.
그녀가 일어서서, 내 앞에 일 초쯤 서서, 고개 숙여 나를 보더니, 허리를 굽혀, 이마를 내 이마에 댔다. 키스가 아니라, 그냥 대고 있었다. 그녀가 내쉬는 숨은 차가웠고, 약간 민트 향이 났다.
“오빠 심장이 되게 빨라요.” “여기서 들려요?” “여기서 보여요.” 그녀가 말하며 손가락으로 내 목을 톡 짚었다. 경동맥이 한 번 한 번 뛰는 그 자리. “지난번에도 이렇게 빨랐어요?” “지난번엔 아무도 여길 안 봤어요.” “그럼 오빠는 모르네요.” “몰라요.”
나는 많은 방에서 보여져 왔다. 얼굴을 보여 주고, 배를 보여 주고, 동생 놈을 보여 주고. 목을 보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내 목에서 손을 떼고, 반 걸음 물러났다. 가디건 단추는 하나도 풀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해도 돼요?”